진리·선택·신앙 · 1/3

진리·선택·신앙 · 1강 · 8분 읽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로 사는 것은 왜 다를까

올바른 내용을 알아도 진실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사과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상처 준 사람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설명이 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옳은 설명을 가진 것과 그것을 살아 내는 일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일까.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의 가명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가 다루는 주체적 진리는 이 틈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다만 그의 중심 문제는 일상의 진정성을 넘어 영원한 행복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있다. 이 종교적 맥락을 빼면 ‘진리는 주체성’은 마음대로 믿어도 된다는 구호가 되고, 맥락만 외우면 다시 남의 삶에 관한 지식으로 남는다.
비 내린 코펜하겐 거리를 혼자 걷는 키르케고르를 재구성한 장면
군중 속에서 단독자로 선택한다는 문제를 붙잡았던 산책과 집필의 도시를 역사적 분위기에 맞춰 재구성했습니다.
실존 철학 · 생애와 자료

정확한 내용을 알아도 남는 문제

1846년의 『후서』는 클리마쿠스가 쓴 『철학적 단편』을 잇는 책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연구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를 갈라 놓는다. 연구가 더 정확해지는 일과 연구하는 사람의 삶이 달라지는 일은 같은 과정이 아니다. 객관적 논의가 끝나는 날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사이에도 살고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계속 빠져나간다.

이 구분에서 중요한 말은 무엇을 아느냐와 어떻게 관계하느냐다. 클리마쿠스는 ‘어떻게’를 말투·목소리·전달 기술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더 감동적으로 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의 관계를 뜻한다. 차분한 설명보다 뜨거운 고백이 늘 낫다는 비교도 아니다.

그는 올바른 신 개념을 아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게 기도하는 장면과, 우상 앞에 있으면서도 무한한 열정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맞세운다. 후자가 더 진실하게 관계할 수 있다는 도발이다. 그렇다고 두 신 개념이 객관적으로 같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올바른 대상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관계까지 올바르다고 보증할 수 없다는 공격이다.

소크라테스도 등장한다. 불멸에 관한 증명을 여러 개 가진 사람은 그에 걸맞게 살지 않을 수 있다. 반면 클리마쿠스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불멸이 있다면이라는 불확실성에 자기 삶을 건다. 이것은 불멸의 사실 여부를 새 실험으로 입증하는 장면이 아니다. 같은 문제를 대하는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하는 수사다.

클리마쿠스는 이런 관계를 객관적 불확실성을 열정적 내면성으로 전유하는 일로 설명한다. 이어 그 정의가 신앙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라고 밝힌다. 자연에서 지혜와 힘을 보더라도 불안과 혼란을 주는 것 또한 발견한다는 예가 따른다. 따라서 이 문장의 불확실성은 아직 설문 표본이 모자란 상태와 같은 뜻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원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이 근거 카드를 비교하며 듣는 공공 독서실
개념을 장면으로 읽기

같은 종교적 내용을 아는 것과 그 내용에 자기 삶을 걸고 관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원전은 그 차이를 기도와 불확실성으로 설명합니다.

핵심 논증

기도·불확실성·비진리가 이어지는 논증

객관적 불확실성은 신앙 이전에 잠시 제거하면 되는 장애물로만 남지 않는다. 클리마쿠스는 신을 객관적으로 붙잡을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신앙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깊은 바다 위에서도 믿는다는 비유는 더 많은 증거가 도착할 때까지의 임시 확신보다 날카롭다.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 관계 자체를 신앙의 조건으로 놓는 것이다.

여기서 논증의 불편함도 드러난다. 믿는 방식이 결정적이라면, 사람을 해치는 믿음에도 진실한 열정이 있다는 이유로 같은 평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원전의 도발은 정확한 내용을 가진 사람의 안일함을 흔들지만,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판단하는 모든 기준을 이 한 문장으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오늘의 독자가 사실 확인과 타인의 거절을 함께 중시하는 것은 이 빈틈에 대한 별도의 응답이다.

내면성은 단 한 번의 장엄한 선택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원전은 결정의 순간 곧바로 사람이 다시 시간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때 ‘어떻게’는 지속하는 노력으로 바뀐다. 어떤 사람은 처음 고백할 때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다음 주에 자신의 말과 더 멀어질 수 있다. 강렬했던 순간의 기억이 지금의 관계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논의는 ‘주체성은 진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클리마쿠스는 소크라테스적 관계를 검토한 뒤 ‘주체성은 비진리’라는 출발을 시험한다. 이것은 앞 문장을 취소하고 객관적 지식만이 답이라고 돌아서는 일이 아니다. 진리로 향하려는 바로 그 사람이 이미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더 어려운 설정이다.

그는 이 비진리를 죄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적으로 기억을 통해 영원한 진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달리, 여기서는 주체가 자기 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는 결론은 논증의 방향과 어긋난다. ‘비진리’를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심리적 자기 기만으로 바꾸어도 죄라는 신학적 전제가 사라진다.

여기에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 나타난다는 그리스도교의 역설이 더해진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로 닮는 면이 있지만 같은 단계로 평평해지지 않는다. 클리마쿠스는 이 차이를 사유하는 가명 저자이며,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종교를 밖에서 설명하는 자신도 그 설명을 산다는 보증을 갖지 못한다는 거리가 남는다.

이 때문에 전유를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이라고만 이해하면 어긋난다. 오히려 설명을 가진 내가 그 설명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에 가깝다. 그 요구를 세속적 삶으로 옮겨 볼 수는 있지만, 사과나 우정의 성실성이 곧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다음 강의가 다룰 선한 의도와 자기 공로의 차이도 여기서 이어진다.

논증을 한눈에

앎·전유·비진리가 만드는 긴장

  1. 무엇을 아는가

    올바른 신 개념이나 불멸의 증명을 가진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삶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2. 어떻게 관계하는가

    불확실성에 관계하는 내면성은 한순간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시간 속의 노력으로 이어진다.

  3. 스스로 충분한가

    비진리와 죄라는 설정은 주체가 자기 힘으로 진리를 확보한다는 생각에 다시 제동을 건다.

객관적 사실을 폐기하는 공식도, 일상의 성실성을 신앙과 동일시하는 단계표도 아니다.

오독하지 않기

강한 믿음과 사실의 정확성 사이

원전은 기도의 관계를 판단하고 있다. 통계·사건의 날짜·타인이 실제로 한 말을 개인의 열정으로 참으로 바꾸는 이론은 아니다. 과학적 판단에서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과 신앙에서 불확실성을 없앨 수 없다는 주장을 한 가지 지식 규칙으로 섞을 수 없다.

그렇다고 키르케고르를 오늘의 합리적 의사 결정 안내자로 순화해도 곤란하다. 객관적 확실성에 대한 도발, 죄와 역설, 무한한 열정은 단순한 가치 선택보다 강한 요구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에게도 설명과 삶의 거리를 드러내는 힘은 남지만, 그 선택적 수용은 원전 전체와 구별된다.

아래 이야기는 편집진이 만든 비종교적 가상 사례다. 불확실한 응답 앞에서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한 측면만 비춘다. 용서를 얻기 위한 공식도, 상대의 거절을 믿음으로 극복하라는 권유도 아니다.

오늘의 장면

가상 사례: 보낼 수 없었던 사과의 말

번역가 다현은 인터뷰에서 친구와의 오해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정작 친구 민주는 그 일을 오해로 여기지 않았다. 다현이 예전에 둘만 나눈 이야기를 허락 없이 에세이에 썼고, 삭제 요청을 받은 뒤에도 이미 인쇄가 끝났다는 답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책의 반응이 좋아지자 다현에게는 잘 해결된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다현은 사과에 관한 여러 글을 읽고 긴 편지를 쓴다. 상처를 주려던 의도는 없었다는 설명과 자신의 부끄러움을 묘사한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다시 읽던 그는 민주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편지 대부분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이해해 달라는 요청임을 발견한다. 문장이 부족해서 보내지 못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출판사에 다음 인쇄에서 해당 대목을 빼 달라고 요청하고, 인터뷰를 실은 매체에도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설명을 바로잡는다. 출판사는 한 부분을 덜어 내면 이어지는 글도 손봐야 한다고 답한다. 수정에는 시간이 들고, 공개된 정정은 그가 숨기고 싶었던 갈등을 다시 드러낸다. 그 비용이 생겼다고 해서 잘못을 갚았다는 생각까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짧아진 사과를 받은 민주는 책의 수정은 고맙지만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다현은 오히려 서운해진다. 이만큼 바꾸었는데도 관계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마음에서, 자신의 사과가 여전히 어떤 결과를 대가로 기대했음을 본다. 그 발견만으로 서운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몇 주 뒤 독자가 인터뷰의 정정을 묻자 다현은 민주가 민감해서 생긴 일이라고 둘러대지 않는다. 다만 친구의 새 답장을 공개하며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증명하지도 않는다. 정정된 책은 나오고 다음 만남은 정해지지 않는다. 사과를 정확히 설명하는 능력보다 오래 남는 것은 이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무엇을 계속하지 않을지의 문제다.

이 결말이 다현에게 신앙이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원전과 닿는 부분은 말을 소유하는 일과 그 말에 관계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의 차이다. 상대의 응답을 보장받지 못한 채 바뀐 행동이 이어진다는 점, 그리고 그 행동도 자기 만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긴장이다.

구분해서 읽기

사실, 개념, 오늘의 적용.

  1. 01

    원전: 클리마쿠스는 기도·소크라테스·불확실성을 거쳐 주체적 진리를 논하고, 이어 비진리·죄·그리스도교의 역설이라는 다른 조건을 검토한다.

  2. 02

    해석: 객관적으로 참인 내용을 안다는 것과 그 내용에 자기 존재로 관계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이 차이가 곧 모든 믿음의 동등한 정당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3. 03

    현대적 응답: 공개된 사실의 정정과 상대의 거절 존중은 가상 사례가 더한 기준이다. 원전의 종교적 요구를 그대로 실현한 장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출처와 읽기 원칙

어디에서 확인했는가.

이 글은 철학자가 오늘의 독자에게 직접 말한 것처럼 대사를 만들지 않습니다. 남겨진 저작과 역사적 자료를 먼저 읽고 현대적 적용을 별도 단계로 구성했습니다.

아래 권·절을 중심으로 읽고 현대적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각 링크의 원문·번역 언어와 판본은 항목에 표시했습니다.

독립 참고 문헌: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øren Kierkegaard ↗
쇠렌 키르케고르 인생 철학 · 전체 12편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