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목소리·삶의 형식 · 2/3

저술·목소리·삶의 형식 · 2강 · 9분 읽기

왜 답을 직접 말하지 않고 여러 목소리로 쓰는가

윤리적 진리를 설명하는 일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는 일의 틈을 어떻게 다룰까?
마음에 드는 철학 문장을 찾았는데 같은 책의 다른 곳에서는 정반대의 말을 만납니다. 어느 쪽이 저자의 진짜 답일까요? 키르케고르의 책에서는 먼저 그 문장을 말하는 이름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 필명은 같은 교훈에 다른 표지를 붙인 장식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삶의 입장을 가진 목소리들이 독자 앞에서 말하고 설득하며, 때로는 자기 말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번 수업은 정답을 골라 주는 권위와 자신의 판단을 요구하는 글 사이의 차이를 읽습니다.
비 내린 코펜하겐 거리를 혼자 걷는 키르케고르를 재구성한 장면
군중 속에서 단독자로 선택한다는 문제를 붙잡았던 산책과 집필의 도시를 역사적 분위기에 맞춰 재구성했습니다.
실존 철학 · 생애와 자료

책상에서 발견했다는 원고와 여러 저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서문은 빅토르 에레미타라는 편집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헌 가구점에서 산 책상의 숨은 공간에서 원고들을 발견했다고 설명합니다. 한 묶음에는 심미적인 글과 짧은 단상이 있고, 다른 묶음에는 첫 묶음의 필자에게 보내는 윤리적인 편지들이 있습니다. 편집자는 두 필자를 A와 B라고 부릅니다. B의 이름은 빌헬름이고 법원의 판사라는 정보도 알려 줍니다.

서문의 첫 질문부터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내면이 같은지를 의심합니다. 에레미타는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말이 어긋났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원고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 관심 속에 놓입니다. 독자가 인물의 직함이나 저자의 명성만 보고 말의 의미를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작의 질문을 지나쳐 버립니다. 책의 입구에서부터 전달하는 사람을 어떻게 아는지가 문제가 되는 셈입니다.

이 발견담은 실제 유고를 수집했다는 역사 보고가 아니라 책 안의 장치입니다. 독자는 키르케고르가 직접 내놓은 결론을 받기 전에, 원고를 발견하고 분류하고 이름 붙였다는 인물의 설명을 통과합니다. 제목과 순서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에레미타는 A의 단편을 배열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구절을 정돈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목소리를 하나로 매끈하게 만드는 일 자체가 읽을 대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저자의 층위가 늘어납니다. A의 원고에 실린 「유혹자의 일기」에서 A는 자신을 그 일기의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라고 내세웁니다. 에레미타는 그 설명을 의심합니다. 한 목소리의 주장과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추측이 엇갈리는 구조입니다. 일기의 인물이 한 말을 A의 신념으로, 다시 키르케고르의 고백으로 곧장 옮기면 이 거리를 모두 지워 버립니다.

키르케고르는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끝에 실명으로 붙인 「최초이자 최후의 설명」에서 자신이 이 책들을 쓴 사람임을 인정하면서도 필명들의 말을 자신의 직접적인 발언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작가들을 만들어 그들의 인생관을 말하게 한 사람이라는 위치를 설명합니다. 필명 저자에게 발언을 귀속하되 출판의 법적·문학적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구분도 명시합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의 원고를 한 권의 정답으로 합치지 않고 나란히 읽는 공동 작업대
개념을 장면으로 읽기

거리의 인물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내면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이 편집 이미지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서문의 겉모습과 내면에 관한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책 안의 필명 저자들을 묘사한 장면은 아닙니다.

핵심 논증

후회의 격언에 배의 비유가 맞설 때

이 구분이 왜 필요할까요? 같은 문장이라도 누가 어떤 삶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1부 「디압살마타」에는 결혼해도 후회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식의 연속된 대조가 나옵니다. 그 대목을 떼어 내면 모든 선택이 무의미하다는 최종 지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A의 단상이며, 책의 다른 목소리가 그대로 승인한 결론은 아닙니다.

이 단상의 힘은 단순히 선택의 단점을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도 같은 후회가 기다린다고 미리 선언하면, 실제 삶에서 어떤 선택을 맡을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모든 결과를 이미 넘어선 관찰자의 자리를 얻습니다. 재치 있는 반복을 즐기던 독자는 자신도 결정을 피하려고 그 자리를 빌리고 있지는 않은지 물을 수 있습니다. 문장의 내용과 독자가 그 문장을 사용하는 방식이 함께 문제로 떠오릅니다.

B의 편지는 바로 이런 삶의 거리를 공격합니다. 삶의 선택을 숙고하는 동안에도 사람은 계속 살아가며, 선택의 조건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배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 동안에도 배는 움직인다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맞서는 것은 낙관적인 격언과 비관적인 격언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바라보는 위치에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과, 이미 시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책이 마지막에 A의 회심을 보고한다면 독자는 B가 이겼다는 결과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에레미타는 서문에서 바로 그 결말이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A가 설득되었는지, B가 자신의 입장을 지켜 냈는지 원고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승패를 논거의 타당성과 바꾸어 받지 않게 하는 구성입니다. 독자는 누가 더 매력적으로 말했는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입장으로 살면 무엇이 달라질지 판단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간접 전달은 일부러 어려운 말을 써 독자를 시험하는 기술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독자가 남의 결론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삶과 맺는 관계를 바꾸도록 하는 전달의 문제입니다. 결단이 중요하다는 명제를 아는 사람도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결단 이야기만 읽으며 살 수 있습니다. 책의 형식은 그 간격을 드러내지만,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실이 그 간격을 자동으로 메우지는 않습니다.

여러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에서 모든 입장이 똑같이 옳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가 제시하는 즐거움과 B가 제시하는 윤리적 삶은 서로를 실제로 비판합니다. B는 윤리적 위치에서 심미적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위계는 논쟁의 일부입니다. 양쪽을 적당히 섞은 중간 답은 이 대립을 흐릴 수 있습니다. 각 목소리가 무엇을 전제로 더 나은 삶을 주장하는지에서 논쟁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실명으로 쓴 설명도 책 밖에서 모든 해석을 끝내 주는 열쇠는 아닙니다. 키르케고르는 같은 대목에서 자신의 실명으로 낸 교화적 담화의 말에는 직접적인 저자라고 밝힙니다. 필명 저술과 실명 저술의 차이를 살피는 이유입니다. 그의 작업 전체를 독자가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고르는 장치로만 읽으면 종교적 저술의 존재와 요구를 놓칩니다. 뒤의 신앙 수업에서는 그 긴장이 더 어려운 형태로 나타납니다.

논증을 한눈에

결말 없는 대화의 세 목소리

  1. 편집자

    에레미타의 발견담과 원고 배열을 거쳐 독자가 A와 B의 말을 만난다.

  2. A와 B

    선택을 미리 후회하는 단상과 이미 흘러가는 삶을 맡으라는 편지가 서로를 비판한다.

  3. 열린 결말

    인물의 회심과 승패가 알려지지 않아 주장의 타당성이 성공담의 결과로 대체되지 않는다.

가명의 차이는 모든 입장을 똑같이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주장과 발화 위치, 출판한 저자의 책임이 함께 남는다.

오독하지 않기

독자의 자유를 말하는 방식도 질문하기

그렇지만 독자의 자율성을 돕겠다는 간접 전달에는 권력의 문제가 남습니다. 교사가 이미 정한 답으로 학생을 이끌면서 스스로 발견했다고 느끼게 한다면, 질문의 형식도 조종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때마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면 자유로운 판단을 요구한다는 말은 닫힌 장치가 됩니다. 어떤 답을 하든 저자가 옳아지는 읽기는 이 글의 방식으로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문학적 거리와 현실의 대화 책임은 같은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책의 독자는 읽기를 중단하거나 다시 읽을 수 있지만, 누군가의 결정 때문에 기다리는 당사자는 답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 밝히지 않은 채 상대가 알아서 깨닫기를 바라는 태도를 키르케고르의 방법으로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간접 전달을 읽는 일은 생활에서 계속 수수께끼로 말하라는 권유가 아닙니다.

오늘의 장면

공연 제안 앞에서 같은 책을 다르게 읽기

가상의 독서 모임에서 연극을 준비하는 수진은 결혼해도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단상을 읽습니다. 그는 오래 고민한 공연 제안을 거절하려던 참입니다. 조연으로 참여하면 다른 작업에 쓸 시간이 줄고, 거절하면 다시 무대에 설 기회를 놓칠 것 같습니다. 수진은 단상이 자신의 머뭇거림을 정확히 알아준다고 느낍니다. 어느 쪽이든 후회할 테니 답을 늦추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함께 읽던 친구는 그 문장이 A의 말이라는 점을 짚고 B의 배 비유를 가져옵니다. 수진은 곧바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이미 연습 일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선택이 간단할지 몰라도, 자신은 일을 마친 뒤의 체력까지 계산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친구의 인용은 그의 실제 조건을 대신 알지 못합니다. 올바른 출처를 붙였다는 것만으로 상대의 결정을 재촉할 권한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모임이 끝난 뒤 수진은 공연 담당자에게 아직 답을 못 정했다고 연락합니다. 담당자는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그 뒤에는 다른 배우에게 제안하겠다고 답합니다. 이때 배의 비유는 막연한 책임감보다 구체적인 시간의 사실과 만납니다. 수진이 비교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의 준비는 진행됩니다. 기다리는 선택에도 결과가 있다는 점이 눈앞에 생기지만, 그렇다고 출연하는 쪽의 비용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수진은 결국 거절합니다. 며칠 뒤 다른 배우의 연습 사진을 보고 다시 아쉬워하며, 자신이 겁이 나서 피한 것인지 생각합니다. 모임 친구는 좋은 결정을 했다고 위로하려 하지만 수진은 아직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그 단상을 자신이 어떤 용도로 썼는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후회를 예상하는 데서 나아가 답변을 미룰 이유까지 얻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과는 별개의 발견입니다.

다음 모임에서 수진은 B가 언제나 더 높은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맡은 삶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갇힐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친구도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책은 공연 참여 여부를 판정하지 않았고 독자 사이의 합의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위로로만 들리던 문장이 논쟁의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다음 회차는 그 논쟁에서 B가 말하는 자기 선택의 내용을 더 가까이 읽습니다.

구분해서 읽기

사실, 개념, 오늘의 적용.

  1. 01

    에레미타의 편집 이야기, A의 단상, B의 편지는 발언의 서로 다른 층위입니다. 인용할 때 이름을 붙이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장하는지 다시 물을 자리가 생깁니다.

  2. 02

    인물의 삶이 성공했다는 결말과 그 인물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판단은 다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서문은 인물의 최종 행방을 알려 주지 않는 형식의 의미를 직접 설명합니다.

출처와 읽기 원칙

어디에서 확인했는가.

이 글은 철학자가 오늘의 독자에게 직접 말한 것처럼 대사를 만들지 않습니다. 남겨진 저작과 역사적 자료를 먼저 읽고 현대적 적용을 별도 단계로 구성했습니다.

아래 권·절을 중심으로 읽고 현대적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각 링크의 원문·번역 언어와 판본은 항목에 표시했습니다.

독립 참고 문헌: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øren Kierkegaard ↗
쇠렌 키르케고르 인생 철학 · 전체 12편 목차